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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울산 남쪽 바다 끝자락, 간절곶은 우리나라에서 해가 가장 먼저 비춘다는 상징으로 유명하다. 지도의 끝처럼 앞으로 툭 튀어나온 곶(串) 위에 서면, 수평선이 직선으로 길게 펼쳐지고 바람은 늘 한 걸음 빠르다. 새벽의 간절곶은 특히 특별하다. 아직 어둠이 내려앉은 잔잔한 바다 위로, 붉은 기운이 아주 천천히 스며들며 세상에 첫 문장을 쓴다. 그 한 줄의 빛을 보기 위해 사람들은 이른 시간부터 삼삼오오 모여든다. 나는 따뜻한 커피 한 병과 작은 노트를 챙겨 간절곶으로 향했다. 바다와 바람, 그리고 기다림. 그 세 가지가 만들어내는 여행의 리듬을 느껴 보고 싶었다.

간절곶 사진

1. 새벽을 건너오는 빛 – 일출을 기다리는 시간

주차장에서 언덕을 살짝 오르면 간절곶의 잔디밭이 넓게 열린다. 아직 해가 오르기 전, 바다는 철푸덕 소리를 줄이고 숨을 죽인 듯 고요하다. 방풍 점퍼 지퍼를 끝까지 올리고 목을 움츠린 채, 삼각대를 세우는 사람들 사이에 자리를 잡는다. 누군가는 연신 셔터를 누르고, 누군가는 손난로를 붙든 채 수평선을 가만히 바라본다. 말이 많지 않은 시간이다. 다만, 서로가 같은 장면을 기다린다는 묵묵한 동지의식이 공기 중에 흐른다.

수평선 위가 미세하게 환해질 때, 바다는 잉크를 머금은 종이처럼 색을 바꾼다. 회색에서 보랏빛, 다시 주황과 분홍을 지나 금빛으로. 마침내 둥근 해가 가장 얇은 선으로 모습을 내밀면, 작은 탄성이 사방에서 새끈하게 터져 나온다. 파도에 비친 빛이 흔들리며 길게 늘어나고, 사람들의 그림자도 같이 길어진다. 햇살이 얼굴을 스치자 새벽의 한기가 살짝 물러난다. 나는 숨을 길게 내쉬고, 노트에 오늘의 첫 문장을 적었다. “빛은 천천히 오지만, 오고 나면 모든 것을 바꾼다.”

해가 꽤 올랐을 때쯤, 잔디밭의 분위기도 달라진다. 누군가는 담요를 펴고 간단한 샌드위치를 꺼내고, 아이들은 빨간 조형물 앞으로 달려간다. 간절곶의 상징 같은 소망우체통. 세계에서 가장 크다는 수식어보다, 그 앞에서 엽서를 쓰는 사람들의 표정이 더 기억에 남는다. “일 년 뒤의 나에게” 보내는 편지함에 나도 몇 마디를 적어 넣었다. 오늘 본 해처럼, 마음도 매일 조금씩 떠오르길 바란다는 짧은 소망을.

2. 바람 따라 걷는 낮의 곶 – 등대, 산책로, 소리의 풍경

일출이 지나고 나면 간절곶은 놀랍도록 한가롭다. 하얀 등대와 잔디 언덕, 바다를 따라 이어지는 산책로가 마치 성격 좋은 이웃처럼 편안하게 다가온다. 파도 소리는 새벽보다 커졌지만, 귀를 괴롭히지 않는 낮은 북소리 같다. 발 아래 부서지는 자갈과 해조류 향이 섞인 바람이 옷섶을 스친다.

등대 주변 데크를 천천히 돌며 시선을 바꾸어 본다. 같은 바다라도 빛의 각도에 따라 결이 달라진다. 강하고 날카로운 아침의 푸름이 정오 무렵이면 한 톤 내려앉아 온화해진다. 수평선에 점처럼 떠 있는 어선, 멀리 유영하는 갈매기, 언덕에 앉아 조용히 책을 읽는 사람까지—이 장면에는 과장이 없다. 바람과 파도, 그리고 사람의 작은 생활. 그 세 가지가 어지럽지 않게 잘 섞여 있다.

산책로를 더 걸으면 바위가 드문드문 드러나는 구간이 나온다. 물때가 맞으면 얕은 웅덩이 속에 투명한 생명들이 꿈틀거린다. 아이들이 허리를 숙여 작은 게를 따라가고, 어른들은 그 옆에서 사진을 찍는다. 나는 바위 위에 잠시 앉아 신발 끈을 조이고, 파도와 바람이 만드는 리듬에 호흡을 맞춰 본다. 마음이 괜히 조급해질 때가 있다면, 이런 풍경 앞에서 ‘천천히’라는 말을 다시 배우게 된다.

3. 떼어가는 오후 – 카페의 창, 어촌의 맛, 드라이브 한 바퀴

간절곶 주위를 조금만 둘러보면 아기자기한 카페와 식당이 꽤 많다. 통유리 창 너머로 바다가 한가득 들어오는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머그컵을 두 손으로 감싸 쥐면, 새벽의 남은 냉기가 산뜻한 졸림으로 바뀐다. 창밖에서는 갈매기 한 마리가 바람을 타고 가볍게 선회한다. 여행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사실 이런 순간이다. 특별한 이벤트도, 값비싼 무언가도 아닌, 창과 바다와 커피가 만들어 주는 잔잔한 ‘쉼’.

점심은 해산물로. 가까운 어촌 식당에서 주문한 따끈한 해물칼국수는 바다에서 바로 건져 올린 듯한 짭조름함과 시원함이 있었다. 김이 피어오르는 그릇을 가운데 두고 오늘의 일출 이야기를 꺼내면, 국물과 대화가 동시에 깊어진다. 반찬으로 나온 멸치볶음과 톳 무침이 이상하게도 더 맛있다. 바다를 보며 먹는 바다의 맛은 늘 더 진하다.

오후에는 진하해수욕장이나 가까운 해안도로까지 가볍게 드라이브를 했다. 창을 반쯤 내리자 바람이 차 안으로 깊숙이 들어왔다. 간절곶에서 시작한 하루가 해안선을 따라 부드럽게 길어지는 느낌. 해가 기울 무렵 다시 간절곶으로 돌아오니, 아침보다 한결 따뜻한 표정의 바다가 맞아준다. 햇살이 잔디 끝에 마지막 금빛을 남기고, 등대가 길게 그림자를 끌고 간다.

결론 – 빛을 본 사람의 걸음은 조용히 단단해진다

간절곶의 하루는 해 뜨는 장면 하나로 설명하기엔 아깝다. 새벽의 기다림, 낮의 산책, 오후의 맛과 쉼까지—하루가 여러 장의 사진처럼 차곡차곡 포개진다. 무엇보다 좋았던 건, 이곳의 시간이 ‘빨리’가 아니라 ‘충분히’ 흐른다는 점이었다. 바다와 바람이 먼저 말을 걸지 않기에, 나도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대답할 수 있었다.

돌아오는 길, 소망우체통에 넣은 엽서가 언젠가 내게 도착하겠지. 그때의 나는 어떤 하루를 살고 있을까. 오늘 본 해처럼 꾸준히 떠오르고 있을까. 간절곶은 화려하지 않지만, 첫 빛을 본 사람의 마음을 조용히 단단하게 만든다. 다음에 다시 간다면, 겨울의 더 선명한 공기 속에서 일출을 만나고 싶다. 손이 얼얼해질 만큼 차가운 바람 속에서, 빛은 더 또렷하게 다가올 테니까. 그렇게 또 한 장의 간절곶을 마음에 덧붙이며, 나는 도시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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